기획 : 교육이란 무엇인가?

공부와 해방에 대한 세 가지 질문

현식(연구공간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

11월, 어김없이 수능의 여파가 전국을 흔들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 정책이 바뀌어도 벌어지는 현상은 언제나 똑같다. 문제는 이 뜨거운 열기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공부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유쾌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적절한 보상이라도 있다면 다행일 테지만 그마저도 요원한 일이다. 바야흐로 공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때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서 프랑스의 지식인인 자크 랑시에르의 책이 있다. 그의 책, 무지한 스승은 제목부터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무지한 스승이 어떻게 제자들을 앎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의 질문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을 보면 그가 말하는 공부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아닌 ‘지적 해방’이다. 일단 우리의 질문을 접어놓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자.

질문 하나. 유식한 스승이냐 무지한 스승이냐

랑시에르가 이 책, 무지한 스승을 통해 던지는 질문의 요체는 이렇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32쪽)” 무척이나 도발적인 질문이다. 어떤 스승을 필요로 하는가. 해방하는 스승,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당연히 해방을 위한 스승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유식한 스승이어야 할까, 무지한 스승이어야 할까. 놀랍게도 그는 무지한 스승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지한 스승이야말로 해방하는 스승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유식한 스승은 학생을 끊임없이 바보로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유식한 스승은 끊임없이 학생의 무능함을 확인할 뿐이기 때문이다. 교육학의 신화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가 ‘설명’해주어야만 학생이 무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우월한 지능(유식한 스승)이 열등한 지능(무지한 학생)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것이야말로 ‘바보 만들기’라고 비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바보로 제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월과 열등의 구분을 하는 순간 이 둘은 모두 바보가 된다. “‘열등한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월한 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왜냐하면 두 지능의 평등을 입증할 수 있는 비슷한 자에게 말을 거는 자만이 자신의 지능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월한 정신은 (자신의 말을) 열등한 자들에게 억지로 들리지 않게 한다. 우월한 정신은 그를 인정해줄 수 있는 자들을 얕잡아봄으로써만 자신의 지능을 확보할 뿐이다.(83-84쪽)”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사람이야말로 바보가 아니겠는가. 고상한 지식인의 언어는 그렇게 스스로를 바보로 만든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바보 만들기’란 지능의 퇴화가 아니다. 따라서 그 반대는 ‘천재 만들기’가 아니다. 오히려 바보란 해방되지 못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바보 만들기의 반대말은 해방이다. 자기가 가진 고유한 지능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다. 열등한 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다른 말로 옮기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국 프랑스에서 망명한 자코토는 루벵에서 강사직을 얻는다. 그가 맡은 수업은 프랑스 문학.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으며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조금도 몰랐다는 데 있었다. 유일한 소통 수단이란 통역뿐이었다. 그러나 자코토는 학생들과 새로운 연결 고리를 맺는다. 바로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이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주문한 것은 매우 간단했다. 네덜란드 번역문을 가지고 프랑스 텍스트를 익히라는 것. 특별한 교수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외울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하기. 그리고 텍스트를 자기의 말로 이야기하기.

이 실험의 결과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학생들은 작가 수준의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무지한 스승인 자코토가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가르친 그 방법에 랑시에르는 주목한다. 그 공부의 결과도 놀라운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지식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점이다. 바보-열등한 자를 만드는 지식이었는가, 아니면 해방된 자를 만드는 지식이었는가.

히브리어를 배운 인쇄공 아들의 이야기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된 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자코토의 인쇄공에게는 정신이 박약한 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데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코토는 아이에게 가르쳤다. 그것도 히브리어를! 그 뒤 그 아이는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히브리어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무지한 스승, 자코토를 통해 경험한 배움이 그를 구원했다. 이전과는 다른 삶, 해방된 자의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공부가 꼭 쓸모 있는 지식을 익히는 것일 필요는 없다. 인쇄공 아들에게 히브리어가 결과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다른 것을 기대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그것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질문 둘. 굴레를 씌우는 공부이냐 해방을 이루는 공부이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논어 첫 장을 펴면 나오는 말이다. 논어가 언제, 누구의 손에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구절로 논어 시작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배움의 문제가 중요하다. 공자가 자기 삶을 돌아보며 이야기할 때도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나는 열 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논어 곳곳에서 공자는 스스로를 호학好學, 배움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한다. 주희는 이 배움(學)을 ‘본받는다(效)’는 뜻으로 해석한다. 먼저 깨달은 자(先覺者)를 본받는 것이 바로 배움이라는 것이다. 주희의 해석을 따른다면 논어에서 말하는 공부(學)란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바보 만들기’에 불과할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등한 자와 열등한 자가 있었다면 주희에게는 먼저 깨달은 자와 나중에 깨닫는 자가 있다.

이 바보 만들기는 끊임없이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한다. 열등한 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우월한 자와의 커다란 간극. 공자 시대에도 이미 공자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공자의 수제자로 꼽히는 안연이었다. 안연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굳세다. 앞에 계신 듯 보이다가도 홀연히 뒤에 계신다. ... 선생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좇아갈 방도가 없구나!” 안연의 이 말은 도저히 공자를 좇아갈 수 없다는 탄식이다. 공자의 칭찬을 독차지하던 안연조차 이렇게 말했으니 다른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공자 시대에 일부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성인聖人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어떻게 해도 닿을 수 없는 존재, 스승으로서의 공자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다.

사실 유가전통에서 말하는 스승은 대체로 이렇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다. 이 사제간의 관계에서 열등한 자는 언제나 열등한 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제자는 제자일 뿐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비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긋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랑시에르가 목표하는 해방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어떨까?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해방된 자인가 아니면 여전히 속박당한 자인가.

공자는 자신의 삶을 지우학志于學으로 시작해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로 정리한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어긋남이 없었다는 말. 이것이 바로 해방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삶이 아닐까? 더구나 유가전통에서는 배움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 끌어들인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라고 말한다. 남을 위한 배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보면 이렇다. 위기지학이란 자기 공부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자기는 물론 사물들을 이루어주는(成物) 데까지 이르는 공부를 말한다. 반대로 위인지학은 남의 평가에 좌지우지하는 공부를 하다 결국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喪己) 데까지 이르는 공부다. 자기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공부, 이것을 랑시에르의 말로 바꾸면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유가전통에서 이런 두 가지 상반된 표상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삶이 속박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자는 그 스승을 통해 자기 해방을 경험한다. 유가 지식인이라면 랑시에르의 말, 무지한 스승이 되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무지한 스승보다는 위대한 스승을! 그러나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다.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해방을 위해선 무엇인가를 배워야만 한다!

이러한 차이는 철학적 지반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랑시에르가 지식과 지능의 문제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를 제시한 반면 유가전통에서는 지식과 지능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찾을 수 없다. 랑시에르가 데카르트의 말을 뒤집어 모든 존재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한 지능을 가졌음을, 따라서 지능이 우월한 자도, 열등한 자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 해방’이라는 부제는 이처럼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유가전통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곧바로 배움의 문제로 도약할 뿐이다.

따라서 랑시에르가 경계하듯 지능의 분할, 즉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스승과 제자의 구분이 굴레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전통이 그의 비판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바로 이 때문이다. 스승은 권위를 갖되 해방케 하는 존재다. 따라서 선각자先覺者와 후각자後覺者로 구분한 주희의 구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분이 랑시에르가 말하듯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분할로 빠질 수 있지만 또한 그로부터 탈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랑시에르가 지적하듯 지적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선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각자 또한 언젠가는 깨달은 자(覺者)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비판한 우월한 자-유식한 스승을 다시 살펴보자. 그가 말하는 스승은 능력의 우월함을 자임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설명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유식한 스승이란 바로 설명하는 자다. 그래서 ‘보편적 가르침’에 해방의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우는 학습 방식. 여기서 해방의 고리가 있다. 무지한 스승은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을 대신해서 ‘의지’가 필요하다. “이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29쪽)”

유가 지식인들은 유식한 스승이었을까? 적어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유식한 스승의 방법과 닮아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방법이 바보 만들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스승은 의지를 일깨운다. 무지한 스승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선뜻 대답을 찾기 어렵다.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그 ‘공부’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속박하는 공부가 아닌 해방하는 공부. 그래서 유가 지식인들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촉발하는 스승.

질문 셋. 전체의 전체냐 부분의 부분이냐

해방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해방의 지식을 얻고 나서는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면 또 다시 새로운 지식을 찾아 모험을 떠나야 할까?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항상 새로운 해방을 찾아야 할까?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통해 프랑스어를 익힌 네덜란드 학생에게, 히브리어를 익힌 인쇄공의 아들에게 또 다른 해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들이 익힌 프랑스어와 히브리어는 세상의 지식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 뿐이지 않는가. 결국 그 해방이라는 것도 일부의 해방이 아니겠는가.

자코토는 말한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그가 학생들과 읽은 텍스트 텔레마코스의 모험, 그 자체가 전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전체가 있다. 그것은 칼립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이 인류 모든 지식의 총체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를 가지고 있는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한 언어가 그것의 형태와 힘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들 중 하나인 것이다. 하나의 전체가 되는 책. 우리가 새로 배우게 될 모든 것을 그에 갖다 붙일 수 있는 어떤 중심. 이 새로운 것들 각각 이해하고, 우리가 거기에서 본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한 것, 그것에 대해 행한 것을 말할 수단을 찾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어떤 고리. 보편적 가르침의 첫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나머지 전체와 연관시켜야 한다.(48쪽)”

전체와 전체가 만나야 한다. 하나의 대상을 통해 전체를 볼 것, 끊임없이 전체와 연관시킬 것. 이것을 유가전통의 말로 옮기면 구도求道, 혹은 궁리窮理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 이름이 ‘궁리’이다! 책 뒷날개에 이런 구절이 붙어 있다. “위학지요爲學之要 막선어궁리莫先於窮理 궁리지요窮理之要 필재어독서必在於讀書 배움의 요체는 궁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반드시 독서에 있다.” 의상이 지었다는 「법성게法性偈」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작은 티끌에도 세계 전체가 담겨있다. 따라서 진정한 깨달음, 지적 해방이란 배움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혀나가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한 텍스트 안에서 세계 전체에 대한 앎을 이룰 수 있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부분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결코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루벵의 프랑스어반 학생들의 지적 모험은, 히브리어를 배운 인쇄공 아들의 지적 모험은 곧 전체의 해방이었다. 이 해방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만 해방이 낯선 빈자들에게 더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랑시에르는 설명자들에게 돈을 지불하거나 여러 해 동안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는 이상 교육받을 다른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빈자들에게 이것을 알려야 한다고. 그러나 이 것 역시 빈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전체를 위한 것이다. 교육-바보 만들기는 열등한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우월한 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이른바 지식인의 자기 해방은 이 지식 해방에 동참하는 데 있는 것이다. 해방은 전체적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누리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해방은 결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 누구와 함께 해방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구원해줄 사람을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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